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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뤽고다르에 대해 알고있는 모든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by 맨기자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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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뤽고다르

장뤽 고다르
Jean-Luc Godard
출생
1930년 12월 3일
프랑스 파리
사망
2022년 9월 13일 (향년 91세)
스위스 홀르
국적
 
프랑스
 
|
 
스위스
 
신체
170cm
직업
영화 감독, 영화 평론가, 각본가, 배우
활동
1954년 ~ 2022년
데뷔
1954년 영화 '콘크리트 작전'
학력
소르본 대학교 (인류학 / 중퇴)
배우자
안나 카리나 (1961~1965)
안 비아젬스키(1967~1979)
안마리 미비유(1971~2022 / 사실혼)
친척
이종사촌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1. 소개

 

" 세상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찍으면, 당신은 TV 영화를 만들 뿐입니다.
"" Il y a le visible et l'invisible.
Si vous ne filmez que le visible, c’est un téléfilm que vous faites.
"프랑스의 영화 감독, 영화 평론가.
누벨바그의 핵심 인물로, 여러 혁신적인 업적과 시도로 영화 혁명가라 불립니다.
누벨바그의 카예 뒤 시네마 출신 감독 5명 중 마지막 생존자이자 2022년까지 활동한 유일한 누벨바그 멤버였습니다.

 

2. 소개

 

일생에 걸쳐 영화의 최전방에 서서 영화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이 만드는 영화 그 자체를 통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또한 현대 영화의 시작점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영화는 영화라는 이름을 가진 고유의 예술 장르이고, 그것은 문학적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와 음향을 통해 다른 예술 장르로 할 수 없는 표현들을 만들기 위해 무한한 실험을 했습니다.
고다르가 수행한 영화의 문학으로부터의 독립, 혹은 혁명을 짧은 글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이유로 고다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라면 문학적 관습을 벗어나야만 느낄 수 있는 그의 영화를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 뤽 고다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자와 총이 전부다.
"고 말했습니다.
사실 고다르의 초중기 영화에는 치정 문제가 줄거리에 나오거나, 총이 소품으로 등장하는게 많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오면서는 항상 최전위에 서있는 사람답게 영화의 형식뿐만 아니라 소재면에서도 매우 다양화하여 영화사를 영화로 만든다거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등의 시도를 했습니다.

 

3. 일생

 

그는 부유한 파리지앵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독일의 낭만 시, 이해하기 어려운 프랑스 소설들을 읽게 했습니다.
2차대전 동안은 스위스의 가족 저택에서 지냈습니다.
전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중심으로 한 영화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프랑소와 트뤼포나 클로드 샤브롤, 앙드레 바쟁, 에릭 로메르 등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들은 3년간 약 2천 여편이 넘는 영화를 보며, 열띤 토론을 볼였습니다.
오후 내내 영화를 다섯편이나 보면서, 각 장르마다 스타일과 형식을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분석한걸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했습니다.
원래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의 평론가였습니다.
집세를 내기 위해 친척들이나 동료 직원들의 돈을 훔쳤습니다.
고다르의 아버지는 보석금으로 아들을 꺼내서 잠시 정신요양원에 보냈습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부유한 집안과 결별했습니다.
그뒤로 스위스의 댐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댐공장에서 일할 때 찍은 영화가 그의 첫 영화 '콘크리트 작전(Operation Beton, 1954년작)'입니다.
그는 평론가를 하면서도 영화를 만들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이후 자신이 영화를 찍을 때를 대비해 사실상 견습용으로 만들게 된 것인데, 그런 의미로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라 대단한 내용은 없고 댐 공장에서 어떤 식으로 건설일을 하는지 담은 정도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이후 나온 수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고다르 특유의 나레이션과 편집 방식의 기미가 조금 느껴지기는 합니다.
20세기 폭스의 파리 지사에서 언론 홍보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에서 1968년까지 14편이나 만들었지만, 금전적 수익을 가져온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는건 프랑스 정부의 재정 지원이 있기 때문.
프랑스는 예술을 중요시해서 그를 비롯한 영화 감독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줍니다.
결코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은 건 아닙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제작비가 부족해 전문 음향기사를 구하지 못한 적도 있어 영화에 쓸, 일상 생활 소음과 효과음을 녹음하기 위해 종종 아파트 아랫집에 몰래 녹음 장치를 갖다 대고 청소나 설거지하는 소리, 그러면서 그 집 아줌마가 중얼거리는 소리 등을 몰래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프랑스 정부가 영화인들에게 하는 재정 지원 기준은 시나리오인데 영상과 음향 충돌 및 조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고다르의 영화 스타일상 내러티브와 스케일 정도만 알 수 있는 시나리오만으로는 영화를 대부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영화인이고 당시 프랑스가 먼 과거부터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좋은 나라라 해도, 시나리오를 중점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영화에 대한 근본적 보수성은 어쩔 수 없었기에 그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1960년 '네 멋대로 해라'로 쿠엔틴 타란티노 수준의 충격적인 데뷔를 한 뒤, 수많은 영화를 발표했습니다.
대본 없이 찍었으며, 점프컷을 자주 사용한걸로 유명합니다.
초창기에는 193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 영향을 받은 듯한 스토리와 파격적인 연출의 영화라면, 이후 영화는 마르크스주의와 68운동에 경도되면서도 팝 아트적인 스타일리시를 공유하는 영화를 보여줍니다.
이후 지하 세계로 파고 들어가 특이한 영화들을 줄창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혁명과 투쟁 정신이 더 이상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 고다르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로 지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상업 영화계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는 정치색을 약화시키고 좀 더 예술성에 경도된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보는 재미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학도들에게는 가히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존재다.
위대하기도 하지만 짜증감도 안겨주기 때문.
그러나 정성일은 고교 시절 고다르의 영화 '기관총 부대'를 프랑스 문화원에서 처음보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고, 고다르 영화를 한편이라도 더 보려고 계속 프랑스 문화원 상영회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순수 영어 자막 뿐이라 정확히 뭔 내용인지도 몰랐음에도 그 카메라의 움직임들을 따로 느낀 순간 그것만으로 기쁘고 재미있었다 합니다.
그래도 현대 영화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는 영화란 "현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문학과는 다른, 또한 다른 예술 장르와는 구별되어야 할 고유의 장르"라는 개념에 충실하였습니다.
영화사에 가장 강한 혁명을 보여준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촬영을 계획하며 렌즈를 선택할 때도 그 영화만의 속성이 부각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였습니다.
미국 한 대학에서 강연할 때, 한 학생이 그를 가리켜 "우리에게 그는 밥 딜런과 마찬가지로 절대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안타까운 부분은 그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는 후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럴 사람이 있었는데, 단순 육체노동자 출신으로 고다르의 연출부 생활을 시작하여 조연출까지 하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장 으스타슈'(Jean Eustache)라는 감독입니다.
그는 '포스트 누벨바그'라 불리며 그의 혁명 후계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고다르와 누벨바그의 동료들도 인정한 훌륭한 작품도 어느 정도는 남겼는데, 자금 사정 때문에 대부분 단편 영화였고 장편은 단 두 편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더 예술 세계를 뻗어가야 할 시점에 장기간 생활고에 시달려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 을 선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제대로 된 후계자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영화 인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고다르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남긴 몇몇 작품만으로도 훌륭하다는 평가는 받으나, 7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낸 고다르처럼 그가 긴 영화 인생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포스트 누벨바그의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만든 중요한 요인이고 안타까운 점입니다.
영화 감독을 작가로 칭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그가 인정한 최초의 작가 감독은 할리우드 스릴러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입니다.
정작 당시 히치콕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영화 감독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영화 찍는데 필요한 기술자들을(촬영, 조명, 음향, 미술 등) 감독하는 관리자' 정도의 인식이었습니다.
가장 좋아한 영화 감독은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라고 합니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 3명이 누구냐고 묻자 '미조구치, 미조구치, 미조구치'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미조구치 겐지가 살았거나 영화 촬영한 지역을 보기 위해 일본 여행을 간 것이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고다르가 방문한 지역 중에는 그가 와서 찍은 사진들을 전시해놓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영화를 좋아한 걸로 보입니다.
"미조구치는 '크레인 숏'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 할 정도로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에서 크레인 숏 방식으로 찍은 롱테이크 장면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실제 고다르 영화에는 미조구치 겐지의 카메라 워킹을 오마주하여 촬영한 장면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의 마지막 엔딩 장면입니다.
미국 감독으로는 니콜라스 레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평론글에 '영화는 니콜라스 레이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알제리 전투가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자 다른 프랑스 영화인들과 같이 반발하여 즉각 퇴장한 바 있습니다.
2000년 초반, 한국 인터넷에서 그가 잠을 자다 급사했다고 헛소문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낚인 바 있습니다.
몇몇 예술 영화 동호회 모임에선 그의 죽음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건배를 했습니다.
이 낚시가 통한 게 1999년 잠을 자다 갑자기 급사한 스탠리 큐브릭이 죽은 지 얼마 안되어서였습니다.
2022년 9월 13일 만 91세의 나이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전 은퇴작이 될 영화가 있다는 뉴스가 떴으나 완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조력 자살로 영면하였는데, 딱히 아프지는 않고 삶에 지쳐서 선택했다고 합니다.
.

 

4. 성격

 

주로 도서관과 박물관에서 지식을 습득했고 스스로를 박물관의 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와는 서로를 끔찍이 아끼던 절친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갑자기 견원지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고다르가 마르크스주의로 변한 탓이라고 혹자들은 본다.
결정적인 계기는 아메리카의 밤 시사회였다고 하는데, 고다르는 영화를 역겹다고 까대자 트뤼포가 반발하면서 틀어졌고 이 이후론 완전히 절교해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선 두가지 소문이 있는데 원래 영화에 대해 계획된 내용을 고다르와도 상의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계획과 이후 실제 찍기 시작한 후의 영화 내용이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된 고다르가 실망하고 분노해 출연하기로 한 것도 안 하고 비난했다는 설과, 고다르가 특별출연하기로 한 걸 트뤼포가 취소시켜 이에 분노했다는 설, 이 두가지다.
서로 원수가 된 후엔, 언제 친구였냐는 듯 서로를 헐뜯었습니다.
트뤼포가 고다르의 자서전 제목으로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를 추천해줬다고.
고다르는 나중에 트뤼포가 뇌종양으로 죽어가자, "그렇게 나쁜 책을 많이 읽어서 그래.
"라고 깠다.
로만 폴란스키가 고다르를 누르고 각색권을 차지한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러 찰스 맨슨 사건이 일어나자 "세상에…거봐…나한테서 각색권을 빼앗아가더니만…"이라 말했습니다.

 

5. 대표작

 

    • 샤를로트와 베로니크, 혹은 모든 남자의 이름은 패트릭이다(Charlotte et Veronique, ou 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1959)고다르 초기의 위트있는 재기발랄한 단편 영화입니다.(19분) 프랑스의 자유로우면서도 가벼운 청춘들의 남녀관계를 보여줍니다. 같은 원룸에서 사는 대학 친구 샤를로트와 베로니크가 수업 끝나고 오후 2시~3시 사이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기를 패트릭이라 소개한 한 남자에게 각자 작업을 당하면서못 만나게 된 뒤 집에 돌아와 서로 자신에게 작업을 건 남자와 각각 내일과 모레 만나기로 했다는 걸 자랑하다 다음날 함께 길거리에서 그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작업거는 걸 보고 서로 당한 걸 깨닫고 창피해 하면서도 '너 남자 취향 괜찮아졌다?'며 허무한 대사를 치면서 그냥 걸어 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다. 제목처럼 영화는 두가지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샤를로트와 베로니크'로 대표되는 가식과 지적인 허영으로 가득한 프랑스 젊은 여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패트릭'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젊은 남자들의 허세와 뻥으로 도배된 속물스러운 작업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패트릭이 한 헌팅 장면의 빠른 속도가 고다르의 영화적 능력을 보여주며 재미를 유발합니다. 마지막에 네 멋대로 해라의 마지막 장면처럼 고다르 영화 특유의 '카메라 정면으로 보기' 기법이 쓰입니다. 남자 주인공에게 당한 걸 깨닫고 여주인공끼리 대화하다 베로니크가 "내일 (데이트 못하게 생겼으니) 나랑 데이트해 줄래?"라며 샤를로트에게 농담을 하자 갑자기 샤를로트가 고개를 확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네가 내 (데이트) 상대가 되어주겠다면"이라고 말합니다. 추후 고다르 영화의 특징인 여러 문제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메시지를 통한 풍자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1959)주인공(장 폴 벨몽도)은 밀수를 하는 걸로 추정되는 사람으로(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 묘사를 하지 않습니다.) 경찰을 죽이고 도주해 경찰에게 쫓깁니다. 그 과정에서 여자(진 시버그)를 만나 살다 추적하는 경찰의 총에 맞아 죽습니다. 1984년 헐리웃에서 리처드 기어 주연으로 "브레드레스(Breathless)"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는데 평은 극과 극입니다. 그렇지만 쿠엔틴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영화 목록에 있습니다. 감독 본인이 주인공의 공개수배가 걸린 신문을 보다 주인공을 경찰에게 신고하는 사람으로 나오며 장 피에르 멜빌이 소설가로 출연합니다. 해외에 발표된 것은 1960년입니다. 실제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은 트뤼포가 찾은 신문 기사라고 합니다. 한 남자가 경찰을 죽이고 연인인 여성과 달아났는데, 마지막에 여성이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트뤼포가 이를 간략한 트리트먼트로 만들었고 고다르가 이것을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기사의 내용이 그대로 영화에 들어가는 내용이기는 한데, 그 중간 과정이 일반인이 저 이야기를 접했을 때 일반적으로 상상할 만한 과정과는 꽤나 다른 스타일로 전개됩니다. "어떻게 그 이야기가 이렇게 풀리지?" 싶을 정도였습니다.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총맞아 죽어가며 하는 대사 "역겨워…"가 유명합니다. 심지어 주인공은 이 말을 하면서 죽을 때 자기가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감게 하면서 죽습니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이런 남자 주인공의 언행을 지켜보다 갑자기 카메라를 노려 보며 "역겹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다른 행인에게 물어보고는 훌쩍 떠나버립니다.
    •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 1965)
    • 여자는 여자다 (Une Femme Est Une Femme, 1961)
    •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1962)
    • 경멸 (Le Mepris, 1963)
    • 기관총 부대 (Le Carabiniers, 1963)
    • 작은 병정 (Le Petit Soldat, 1963)
    • 국외자들 (혹은 외부자들, Bande A Part, 1964)
    • 알파빌 (Alphaville, 1965)
    • 중국 여인 (La Chinoise, 1967)
    • Masculin Feminin(1966)
    • 주말 (Le Week-end, 1967)
    • 넘버 투 (Numero Deux, 1975)
    •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Sauve Qui Peut(La Vie), 1980)
    • 영화사(들) (Histoire(s) Du Cinéma, 1998)
    • 아워 뮤직 (Notre Musique, 2004)
    • 필름 소셜리즘 (Film Socialisme, 2010)
    •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3D, 2014)장 뤽 고다르가 만든 최초의 장편 3D 영화로, 자비에 돌란의 <마미>와 함께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암컷 개 Roxy Miéville이 개종려상도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이 만든 영상을 보냈습니다.
  • 이미지 북 (2018)2018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으로 특별상 수상. 놀랍게도 이번엔 기자회견장에 페이스타임로나마 참석해 스마트폰을 보면서 질의응답을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6. 이야기들

 

  • 페루 59대 대통령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의 사촌입니다. 쿠친스키의 모친이 고다르 가문 출신이라고.
  • 그의 사생활은 무척 금욕적이었습니다. 마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담배만은 예외적이라 골초다.
  • 스티븐 스필버그를 싫어합니다. 고다르 왈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모릅니다. 또, 그의 영화가 그리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노년기부터 사람들 눈에 잘 안 띄고 은둔해 사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스위스에 있는 자택의 모든 문과 창문은 단단히 잠겨있고, 초인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로 한때 친분이 있던 누벨바그 감독 아녜스 바르다가 직접 자택까지 찾아갔지만, 역시 문을 걸어잠근 채 문 앞에 적어둔 암호를 통해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대신 비대면 인터뷰나 통화는 관대했는지 사망 전까지도 간간히 하곤 했습니다.
  • 전 부인 안나 카리나는 "같이 있으면 무척 짜증나지만, 떨어져 있으면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칭했습니다.
  • 2017년 그의 생을 다룬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장 뤽 고다르>가 개봉했습니다. 감독은 <아티스트>로 유명한 미셸 아자나비시우스다.
  • 잉마르 베리만은 고다르를 건질만한 게 전혀 없고 지적인 척이나 하고 무의미하며 재미도 없고 지루하며 따분한 감독, 비평가들이나 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 말했습니다. 정작 고다르는 베리만을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 애니메이션 감독 토미노 요시유키가 존경하는 영화 감독입니다. 좋아하는 작품은 네 멋대로 해라와 미치광이 삐에로라고 합니다.
  • 애니메이션 감독 오시이 마모루가 매우 존경하는 감독입니다. 오시이 말로는 "영화의 역사는 고다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초기 작품 말고는 별로 재미는 없지만 위대한 감독이고 그의 영화는 교과서입니다. 이런 재미 없고 실험적인 영화를 스폰서를 계속 받고 찍었다는 점에서 그는 위대합니다."고 평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알파빌이라고 하며 오시이의 영화 붉은 안경은 알파빌의 오마주입니다. 오시이의 제자 카미야마 켄지는 오시이가 계속 고다르 영화를 보라고 해서 보다 팬이 되었다고 합니다.
  • 2020년 4월 7일 인스타그램으로 로잔 예술 대학교와 함께 라이브 인터뷰를 했습니다.

 

7. 필모그래피

 

연도
제목
역할
비고
연출
각본
출연
기타
1960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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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여자는 여자다, Une femme est une fe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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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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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작은 병정, Le Petit sold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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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963
기관총부대, Les Carabin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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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963
사랑과 경멸, Le Mép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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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O
   
1964
국외자들, Bande à part
O
O
O
   
1964
결혼한 여자, Une femme mari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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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O
   
1965
알파빌,
Alphaville: une étrange aventure de Lemmy Caution
O
O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1965
미치광이 삐에로, Pierrot le Fou
O
O
     
1965
남성, 여성, Une femme mariée
O
O
     
1966
아메리카의 퇴조, Made in U.S.A
O
O
O
   
1967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2 ou 3 choses que je sais d'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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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O
   
1967
중국 여인, La Chino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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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967
주말, Week-end
O
O
     
1968
악마에 대한 동정, One Plus One
O
O
     
1968
원 P.M., One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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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969
즐거운 지식, British Sou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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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969
대영제국의 소리, Le Gai sa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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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994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
JLG/JLG, autoportrait de décemb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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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O
편집
 
1996
포에버 모차르트, For Ever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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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편집
 
2001
사랑의 찬가, Eloge de l'amour
O
O
     
2004
아워 뮤직, Notre musique
O
O
O
   
2010
필름 소셜리즘, Film Socialisme
O
O
     
2014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O
O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2018
이미지 북, Le Livre d'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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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칸 영화제 특별 황금종려상
 
Funny Wars
O
       
 
Scenario
O
       

 

8. 외부 링크

 

MBC FM4U - 정성일, 이주연의 영화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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