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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제6대 주석
후진타오 胡锦涛 | Hú Jǐntā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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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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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2월 21일 (7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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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타이저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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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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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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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15일 ~ 2003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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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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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15일 ~ 2012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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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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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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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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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19일 ~ 2012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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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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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융칭 (刘永清, 1940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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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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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후하이펑 (胡海峰, 1971년 11월)
딸 후하이칭 (胡海清, 1972년 12월) |
학력
|
타이저우 중학 (고교) (졸업)
칭화대학 (수리공학 / 학사) |
종교
|
무종교(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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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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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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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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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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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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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융칭 (刘永清, 1940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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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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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후하이펑 (胡海峰, 1971년 11월)
딸 후하이칭 (胡海清, 1972년 12월) |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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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저우 중학 (고교) (졸업)
칭화대학 (수리공학 / 학사) |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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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교(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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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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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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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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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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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후진타오 주석의 초상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재직한 인물입니다.
이른바 "과학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당의 행동 강령에 집어넣으면서 명실상부한 4세대 중국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과학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내세운 발상이라고 합니다.
2007년의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으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습니다.
뒤의 두가지 아이디어보다 원자바오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기도 합니다.
주석 재임 기간에도 논란이 없진 않았지만 후진타오 주석 시절과 2010년대 중후반 이후의 중국의 스탠스나 상황이 워낙 달라진데다, 후임이 된 시진핑이 주석 임기제를 깨고 종신 집권제를 꾀하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다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제6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재직한 인물입니다.
이른바 "과학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당의 행동 강령에 집어넣으면서 명실상부한 4세대 중국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과학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내세운 발상이라고 합니다.
2007년의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으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습니다.
뒤의 두가지 아이디어보다 원자바오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기도 합니다.
주석 재임 기간에도 논란이 없진 않았지만 후진타오 주석 시절과 2010년대 중후반 이후의 중국의 스탠스나 상황이 워낙 달라진데다, 후임이 된 시진핑이 주석 임기제를 깨고 종신 집권제를 꾀하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다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2. 초기 이력
청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후진타오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나라 때 절강순무로 재직하며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호종헌의 직계 자손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찻집 주인 겸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후진타오가 7살 때에 사망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후진타오와 학생들1959년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입학했고, 1965년 졸업하고 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벌어졌지만, 하방(下放)되지 않고 1968년 간쑤성의 류자샤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자원하여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문화대혁명의 폭풍을 피해갔습니다.
이후 간쑤성에서 계속 기술공무원으로 경력을 쌓다가 지방 시찰을 나온 후야오방의 눈에 띄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탁되었습니다.
장년기 시절의 후진타오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5년 9월, 중국공산당 2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이어 1985년 구이저우성 당 서기로 임명되었는데, 구이저우가 깡촌 오브 깡촌인데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후야오방도 1987년 1월 실각하면서, 사실상 여기가 그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점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티베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이어지자, 1988년 12월 당 중앙은 후진타오를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하여 라싸로 급파하였습니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단호하게 소요를 진압하면서 강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습니다.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차세대 주자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맡은 데 이어 2003년 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후진타오와 덩샤오핑일설에 의하면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지위를 넘겨주는 대신 차기 국가 주석은 후진타오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장쩌민도 이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국가 주석에 등극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입니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정부수반)는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입니다.
명나라 때 절강순무로 재직하며 왜구 토벌에 앞장섰던 호종헌의 직계 자손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찻집 주인 겸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나 후진타오가 7살 때에 사망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후진타오와 학생들1959년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입학했고, 1965년 졸업하고 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이 벌어졌지만, 하방(下放)되지 않고 1968년 간쑤성의 류자샤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자원하여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문화대혁명의 폭풍을 피해갔습니다.
이후 간쑤성에서 계속 기술공무원으로 경력을 쌓다가 지방 시찰을 나온 후야오방의 눈에 띄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탁되었습니다.
장년기 시절의 후진타오1982년 9월,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5년 9월, 중국공산당 2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이어 1985년 구이저우성 당 서기로 임명되었는데, 구이저우가 깡촌 오브 깡촌인데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후야오방도 1987년 1월 실각하면서, 사실상 여기가 그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점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티베트 지역에서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승려들의 반중 시위가 이어지자, 1988년 12월 당 중앙은 후진타오를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임명하여 라싸로 급파하였습니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단호하게 소요를 진압하면서 강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습니다.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 덩샤오핑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차세대 주자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1998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맡은 데 이어 2003년 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후진타오와 덩샤오핑일설에 의하면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지위를 넘겨주는 대신 차기 국가 주석은 후진타오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장쩌민도 이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국가 주석에 등극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입니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정부수반)는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입니다.
3. 대국 굴기 - 대외적 치적
그의 통치 시대는 전반기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일어선다)'에 이어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의 '돌돌핍인(咄咄逼人)'까지 나아갔습니다.
중국은 그의 10년 치세 동안 가히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처음 4년간(2003년 말 ~ 2007년 말)에는 GDP가 12조 위안(1.
5조 달러)에서 24조 위안(3조 달러)으로 2배, 무역액은 3.
5배(6천억 달러 → 2조 1천억 달러)나 성장했고, 후반 임기 5년 동안에도 계속 성장하여 2010년 일본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습니다.
5배 가까이 증가한 외환 보유액은 이미 2007년 1조 5천억 달러로 세계 1위가 되었습니다.
국민 소득도 3000불이 채 안되던 당시 상황에서 5000불까지 크게 증가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증가는 환율과 인플레이션의 원인도 있었기에 이 시기 중국의 물가도 상당히 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후진타오 시대에 중국인의 1인당 GDP가 5000불이 되면서 중국은 비로소 후진국에서 벗어나 중진국 수준의 질적 경제를 가지게 됩니다.
대외적으로는 항공모함(랴오닝급)까지 도입했습니다.
중국은 그의 10년 치세 동안 가히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처음 4년간(2003년 말 ~ 2007년 말)에는 GDP가 12조 위안(1.
5조 달러)에서 24조 위안(3조 달러)으로 2배, 무역액은 3.
5배(6천억 달러 → 2조 1천억 달러)나 성장했고, 후반 임기 5년 동안에도 계속 성장하여 2010년 일본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습니다.
5배 가까이 증가한 외환 보유액은 이미 2007년 1조 5천억 달러로 세계 1위가 되었습니다.
국민 소득도 3000불이 채 안되던 당시 상황에서 5000불까지 크게 증가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증가는 환율과 인플레이션의 원인도 있었기에 이 시기 중국의 물가도 상당히 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후진타오 시대에 중국인의 1인당 GDP가 5000불이 되면서 중국은 비로소 후진국에서 벗어나 중진국 수준의 질적 경제를 가지게 됩니다.
대외적으로는 항공모함(랴오닝급)까지 도입했습니다.
4. 동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후진타오 중국 주석노다 요시히코 일본 수상후진타오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겉으로는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경제적으로도 한국, 일본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며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북한의 편을 들어준 것을 제외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시진핑과는 달리 당시 대만의 천수이볜 민진당 정권에 대해서도 유화책을 쓰려고 했으며 인도, 베트남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2002년에서 2012년 사이의 인도인과 베트남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시진핑 집권기의 중국과 비교해 굉장히 좋았습니다.
후진타오 집권 시기 한국과 일본 내에서는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약간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와 같은 이미지까지 존재했습니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흔히 대륙 시리즈라고 하여 중국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올리는 것이 굉장히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후진타오 시기의 중국이 가진 이미지를 잘 보여줬던 대목입니다.
후임 시진핑 주석의 오만한 행보로 한국과 일본에서 중국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짱깨, 지나 등의 비하적인 명칭으로 중국을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졌지만 후진타오 시기에는 중국을 두고 스스로 대륙, 파트너라고 부르는 경우도 매우 많았습니다.
이렇게 후진타오 시대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중국의 성장은 대한민국에게 있어서도 중국으로의 수출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어 경제 안정의 토대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한국을 존중하는 중국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비추어져 국가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지만 동북공정이나 이어도와 같은 실제적 위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후임 시진핑이 중국의 신세대이자 애국민족주의로 뭉친 소분홍 세대를 이끌고 노골적으로 한국을 상대로 동북공정과 문화공정을 진행한다면 후진타오는 한국을 상대로 온건하고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중국에 호감을 가지게 하고 뒤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후진타오 시대에 이미 고구려 역사 침탈이 본격화됐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조선족을 앞세워 한복을 등장시켰음에도 당시 한국 대중은 크게 중국에 반감을 가지거나 분노하지 않았으며 가볍게 논란만 되었을 뿐입니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일본, 북한의 경우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위협의 본격화가 대표적입니다.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최대 수출국 자리를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차지하였습니다.
일본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라는 입장을 이용한 후진타오는 무역과 자원을 무기로 일본을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당시 일본인들을 경악시키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 시기 북핵에 의한 대북 제재로 사실상 후진타오 시대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종속이 되어 위화도 황금평과 라진항을 50년간 임대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전랑 외교를 펼치는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는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펼치며 뒤에서 서서히 잠식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걷는 시진핑보다 후진타오가 장기적으로 훨씬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상당합니다.
대한민국 정부와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연평도 포격전에서 북한의 편을 들어준 것을 제외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시진핑과는 달리 당시 대만의 천수이볜 민진당 정권에 대해서도 유화책을 쓰려고 했으며 인도, 베트남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2002년에서 2012년 사이의 인도인과 베트남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시진핑 집권기의 중국과 비교해 굉장히 좋았습니다.
후진타오 집권 시기 한국과 일본 내에서는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약간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와 같은 이미지까지 존재했습니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흔히 대륙 시리즈라고 하여 중국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올리는 것이 굉장히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후진타오 시기의 중국이 가진 이미지를 잘 보여줬던 대목입니다.
후임 시진핑 주석의 오만한 행보로 한국과 일본에서 중국에 반감을 가지게 되어 짱깨, 지나 등의 비하적인 명칭으로 중국을 부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졌지만 후진타오 시기에는 중국을 두고 스스로 대륙, 파트너라고 부르는 경우도 매우 많았습니다.
이렇게 후진타오 시대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중국의 성장은 대한민국에게 있어서도 중국으로의 수출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어 경제 안정의 토대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한국을 존중하는 중국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비추어져 국가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지만 동북공정이나 이어도와 같은 실제적 위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후임 시진핑이 중국의 신세대이자 애국민족주의로 뭉친 소분홍 세대를 이끌고 노골적으로 한국을 상대로 동북공정과 문화공정을 진행한다면 후진타오는 한국을 상대로 온건하고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중국에 호감을 가지게 하고 뒤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후진타오 시대에 이미 고구려 역사 침탈이 본격화됐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조선족을 앞세워 한복을 등장시켰음에도 당시 한국 대중은 크게 중국에 반감을 가지거나 분노하지 않았으며 가볍게 논란만 되었을 뿐입니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일본, 북한의 경우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위협의 본격화가 대표적입니다.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최대 수출국 자리를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차지하였습니다.
일본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라는 입장을 이용한 후진타오는 무역과 자원을 무기로 일본을 외교적으로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당시 일본인들을 경악시키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 시기 북핵에 의한 대북 제재로 사실상 후진타오 시대 중국에게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종속이 되어 위화도 황금평과 라진항을 50년간 임대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전랑 외교를 펼치는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는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펼치며 뒤에서 서서히 잠식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걷는 시진핑보다 후진타오가 장기적으로 훨씬 위험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상당합니다.
5. 경제 성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인권 문제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의 후진타오재임 10년(2002-2012)간 중국의 경제규모가 네 배 이상 성장했습니다.
(2002년 1.4조달러, 2012 8.5조 달러) 대침체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거품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고 보다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현황은 중국/경제를 참조.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중국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중국의 산아제한정책은 군사정권 시대 한국보다도 더한 수준으로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소득은 겨우 중진국 수준에 불과한 반면, 빠르게 동아시아의 선진국인 한국, 일본, 대만 수준의 초저출산, 초고령화 사회가 닥쳐온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습니다.
특히 상하이나 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합니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같은 느낌도 납니다.
또한 이 시기부터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으며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습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수습을 했습니다.
후진타오 시대 경제의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렸지만, 당시 1억 5,000만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다만 마오쩌둥 시대 문화대혁명 직후에는 중국의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도 더 낮았지만 후진타오 시대에 이르러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 4배 이상으로 뛰어올랐습니다.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를 모두 잡기는 힘들다는 것을 감안하고 본다면 비판을 받더라도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후진타오 시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25만에서 30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되었고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
7%에 육박했습니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이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규모의 올림픽 경기장을 건설하고 못사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공안까지 동원하여 베이징 내 빈곤층을 주거지에서 끌어내리는 강제 이주 조치가 있었습니다.
후임 시진핑과 비교를 한다면 인권문제에 있어서 후진타오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편이나 이것은 시진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 후진타오의 행태 역시도 서방의 기준에선 정상적인 국가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2002년 1.4조달러, 2012 8.5조 달러) 대침체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거품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고 보다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현황은 중국/경제를 참조.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중국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중국의 산아제한정책은 군사정권 시대 한국보다도 더한 수준으로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소득은 겨우 중진국 수준에 불과한 반면, 빠르게 동아시아의 선진국인 한국, 일본, 대만 수준의 초저출산, 초고령화 사회가 닥쳐온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습니다.
특히 상하이나 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합니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같은 느낌도 납니다.
또한 이 시기부터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으며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습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수습을 했습니다.
후진타오 시대 경제의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렸지만, 당시 1억 5,000만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다만 마오쩌둥 시대 문화대혁명 직후에는 중국의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도 더 낮았지만 후진타오 시대에 이르러 1인당 소득이 인도보다 4배 이상으로 뛰어올랐습니다.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를 모두 잡기는 힘들다는 것을 감안하고 본다면 비판을 받더라도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후진타오 시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25만에서 30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되었고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
7%에 육박했습니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이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규모의 올림픽 경기장을 건설하고 못사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공안까지 동원하여 베이징 내 빈곤층을 주거지에서 끌어내리는 강제 이주 조치가 있었습니다.
후임 시진핑과 비교를 한다면 인권문제에 있어서 후진타오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편이나 이것은 시진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 후진타오의 행태 역시도 서방의 기준에선 정상적인 국가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6. 미국과의 관계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상단)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하단)후임 시진핑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여 세계 정세를 뒤흔들고 최악의 미중 관계를 만든 것과 달리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미국과 상당히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사진 상단은 2006년 04월 21일, 후진타오 주석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공식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받았을 때의 모습입니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왼쪽 팔 소매를 잡아끌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후 주석을 준비된 계단으로 안내하려고 다른 계단으로 내려갈려는 후 주석의 소매를 잡아끈 것이나, 이때 후 주석이 짜증을 내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방영됐습니다.
소매를 잡아끄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입고 있었던 양복이 찢어졌는데, 알고보니 이게 또 짝퉁 이태리 양복임이 밝혀져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일부러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도 없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미국의 모든 방송사와 중국 국영 방송인 CC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서 말이 매우 많았습니다.
당연히 중국측에서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라며 비판했고, 미국측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한편 퇴임 전까지 오바마 미국 대통령하고도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이른바 G2라며 세계 양강으로 대우했고 대신 그만한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중동 문제에서 발을 빼는 대신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일원이었습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상단)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하단)후임 시진핑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여 세계 정세를 뒤흔들고 최악의 미중 관계를 만든 것과 달리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미국과 상당히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사진 상단은 2006년 04월 21일, 후진타오 주석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공식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받았을 때의 모습입니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왼쪽 팔 소매를 잡아끌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후 주석을 준비된 계단으로 안내하려고 다른 계단으로 내려갈려는 후 주석의 소매를 잡아끈 것이나, 이때 후 주석이 짜증을 내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방영됐습니다.
소매를 잡아끄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입고 있었던 양복이 찢어졌는데, 알고보니 이게 또 짝퉁 이태리 양복임이 밝혀져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일부러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도 없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미국의 모든 방송사와 중국 국영 방송인 CC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서 말이 매우 많았습니다.
당연히 중국측에서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라며 비판했고, 미국측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한편 퇴임 전까지 오바마 미국 대통령하고도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이른바 G2라며 세계 양강으로 대우했고 대신 그만한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중동 문제에서 발을 빼는 대신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아시아 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일원이었습니다.
7. 퇴임
- 자신이 첫 몇 년 간 장쩌민의 눈치를 보며 반쪽짜리 국가원수였던 설움을 후임자에게는 겪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입니다. 즉 자신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퇴임함으로써 아직도 상당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장쩌민까지 함께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정치적 메시지로 보입니다. 실제로 장쩌민은 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도 후진타오 바로 옆자리를 항상 차지하는 등 아직 막강한 권력이 있음을 과시하였습니다.
-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바로 넘겨주었다는 관측입니다.
- 중앙 군사위 주석 직을 바로 넘겨준 것 자체가 '빚지게 만든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즉 바로 넘겨주는 은혜를 베풀어 자신과 계파인 공청단을 해코지하는 것을 막은 의도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습니다. 사실 둘 다 의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시진핑의 집권 자체가 후진타오의 장쩌민에 대한 대항 의식 때문이고 둘이 연계해 장쩌민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진실은 후진타오 본인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상하이방 다음의 반부패 타겟은 공청단인게 확실해져가는 분위기이기에 시진핑에게 배신당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8. 퇴임 이후
2019년 중국 국경절 열병식의 후진타오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에서, 장쩌민과 함께 오랜만에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매우 동안이었던 현직 시절과는 달리 백발에 크게 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기야 그도 당시 기준으로 7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상태였고 권좌를 떠난지 7년 차였습니다.
시진핑 옆자리 90대의 나이에 접어든 장쩌민보다도 더 늙어보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21년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의 후진타오2021년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는데, 2년전과 마찬가지로 백발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재임 기간과 달리 흑발 염색을 완전하게 그만둔 것으로 보입니다.
매우 동안이었던 현직 시절과는 달리 백발에 크게 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기야 그도 당시 기준으로 7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상태였고 권좌를 떠난지 7년 차였습니다.
시진핑 옆자리 90대의 나이에 접어든 장쩌민보다도 더 늙어보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21년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의 후진타오2021년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는데, 2년전과 마찬가지로 백발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재임 기간과 달리 흑발 염색을 완전하게 그만둔 것으로 보입니다.
9. 고통과 수난의 10년 권좌
10. 약력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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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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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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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소재 칭화대학 수리공정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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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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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시짱 자치구 당 서기, 14차 당 대회 최연소 정치국 상무위원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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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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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당시 당국의 무력 진압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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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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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중점 배양 후계자로 지명, 당 서열 7위로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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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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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재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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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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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부주석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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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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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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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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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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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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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문, 부시와 재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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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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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총서기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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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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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석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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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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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군사위 주석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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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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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 주석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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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타
-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편에 따르면 대학 시절 한 과목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 후진타오 자신은 중국 최대의 성군 중 하나로 꼽히는 강희제를 그토록 본받고자 했으나, 정작 후진타오의 뒷배로 정권을 잡은 후임 시진핑은 강희제의 흔적을 문화 정책 등에서 지우다시피 합니다. 시진핑이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상기하면, 시진핑의 야욕을 가늠치 못하고 그에게 순순히 권좌를 넘긴 것이 후진타오의 실책이라는 평도 있습니다.
- 그의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만두고 찻집을 운영했는데, 전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찻집을 빼앗겼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나라에서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2003년에 일어난 사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태 진상을 은폐한 자들을 엄벌에 처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사스 사태가 진정된 후에는 자국의 책임이라는 등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 대한민국의 여배우 이영애와 만났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실제로도 후진타오는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았습니다. 특히 조선 궁녀의 이야기를 다룬 요리 드라마 대장금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 덕에 이영애를 직접 초대해 만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 애처가라고 합니다. 아내 류용칭이 자신의 부탁으로 공산당원으로서의 출세를 포기하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아내를 아껴준다는 뒷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 의외로 키가 175cm로 큰 편이었습니다. 현직 국가주석 당시 사진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168cm)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173cm)보다 확연히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키가 178cm 전후로 추정되는 시진핑 주석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2006년 아베 신조(175cm)와의 회담 당시에도 신장의 차이가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노쇠하여 173cm로 줄었지만 여전히 객관적으로 봐도 덩치가 큰 편인 시진핑과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 자식이 두명 있는데 큰아들 후하이펑(胡海峰, 1971년생)은 기업인으로 재직하다가 2010년대 관리로 전직해서 저장성 자싱시에서 부시장까지 역임했습니다. 2019년 9월 일부 반중 화교 언론들이 "시진핑이 후진타오를 달래기 위해 그의 아들인 후하이펑을 시안시장으로 임명한다"는 설을 풀었으나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각국의 정상들을 줄줄이 세워놓고 마치 황제가 알현을 받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 각국에 외교 결례가 아니냐는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상단 사진은 당시의 모습으로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 트라이안 버세스쿠 루마니아 대통령, 후쿠다 야스오 일본 수상의 모습입니다. 옆자리에는 정상들의 배우자가 위치했습니다.
- 중국의 역대 집권자들 중에서 화궈펑을 제외하면 가장 짧은 집권 기간을 기록했습니다. 원래 관료출신으로 본인의 권력 의지가 아니라 덩샤오핑의 낙점으로 정권을 승계한지라 권력확대나 집권연장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국가주석 임기만 따지자면 장쩌민과 마찬가지로 10년입니다.
- 대한민국의 중국 표준음 제도가 전면적으로 적용 된 첫 지도자입니다. 모택동(마오쩌둥), 화궈펑 시기까지는 거의 대부분 한국한자음으로 표기되었고, 덩샤오핑, 장쩌민은 중국어 발음과 한국한자음 표기가 공존했습니다.
- 시진핑이 시다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것처럼 이쪽 역시 후꺼(胡哥 : 후 형님)라는 별명이 있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 후진타오는 자신에 대한 호칭에 대해 시진핑마냥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진핑에 비해 자기 애칭이 그다지 유명해지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 후진타오(胡锦涛)라는 이름의 한국 한자음은 호금도다. 대한민국에선 주로 노년층 위주로 원세개(위안스카이), 모택동(마오쩌둥), 주은래(저우언라이), 등소평(덩샤오핑)과 같이 중국 권력자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후진타오의 경우 호금도라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시진핑의 경우, 잘 쓰이진 않아도 습근평이라는 한국식 발음의 이름도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후진타오를 호금도라고 부르면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북한에서는 주로 중국인들의 이름을 중국식보다 한국식으로 발음하는지 선전 방송에서 '호금도 동지'라고 언급되어 북한에서는 후진타오보다 호금도가 더 익숙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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