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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잘 알지 못했던 고르바초프 에 대한 이야기들

by 맨기자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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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초대 대통령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출생
1931년 3월 2일
 
소련
 
러시아 SFSR 북캅카스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볼노예
(現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볼노예)
사망
2022년 8월 30일 (향년 91세)
 
러시아
 
모스크바 쿤세보구 티모셴코 중앙임상병원
재임기간
제6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85년 3월 11일 ~ 1991년 8월 24일
제11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88년 10월 1일 ~ 1989년 5월 25일
초대 소련 최고회의 주석
1989년 5월 25일 ~ 1990년 3월 15일
초대 대통령
1990년 3월 15일 ~ 1991년 12월 25일
부모
아버지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
어머니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배우자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1953–1999, 사별)
자녀
딸 이리나 미하일로브나 비르간스카야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무종교 (사실상 러시아 정교회)
신체
175cm
부모
아버지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
어머니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배우자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1953–1999, 사별)
자녀
딸 이리나 미하일로브나 비르간스카야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무종교 (사실상 러시아 정교회)
신체
175cm

1. 소개

 

하나의 완벽한 공산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들만이 정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도 타국의 국내 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를 선언하며.
“농업 상황이 처참한 지경입니다.
1917년부터 말이지요.
”체르넨코 정권 시기 농업부 장관 재임 도중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의 회담에서.
소련의 마지막 최고지도자로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제11대 최고회의 주석이자 소련의 유일한 대통령.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재임하면서 조지 H.W.부시 대통령과 길고 길던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이자 고르비(Gorbi)라는 별칭으로도 불립니다.
소련 정치 및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혁신(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소련을 살리려고 진정한 의미에서 노력한 마지막 인물로써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기득권층의 반발(8월 쿠데타)과 보리스 옐친 등 신진 세력의 대두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소련을 붕괴의 길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서구권을 포함한 자유 진영에서는 냉전을 종식시킨 그를 높이 평가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초강대국 소련을 멸망시킨 매국노'라는 부정적 평가가 많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 더불어 인지도가 높은 소련 정치인들 중 하나입니다.
.

 

2. 어린 시절 및 출세 가도

 

남러시아 캅카스 인근의 스타브로폴 프리볼노예에서 농부였던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와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사이에서 2남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여러 인종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며, 그의 외가는 우크라이나계 카자크와 러시아인의 혼혈 집안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역사상 최초로 러시아 혁명 이후에 태어난 서기장입니다.
바꿔 말하면 처음부터 소련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공산국가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출신 성분은 농민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는 농부였고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콤바인을 모는 등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해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도 열심히 했고, 공부도 잘한데다가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최고 명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고, 1955년 법학 학위를 받습니다.
재학 시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고향인 스타브로폴에서 관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고, 중앙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안드로포프 같은 사람들 눈에 띄어 초고속으로 출세했습니다.
사실 고르바초프는 당대의 러시아인 공산당 당원치곤 술을 멀리하고 아첨을 할 줄 몰랐습니다.
이 점은 당대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흔했던 술고래 관료들을 몹시 한심하게 생각한 안드로포프가 주목하면서 오히려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고, 하루에 10시간 정도의 일은 전혀 불평 없이 해내던 근면한 근무 자세도 플러스가 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농업문제에 대해서 브레즈네프나 코시긴에게 직언하는 등 강단이 있는 간부로 여겨졌고, 이 때문에 소련 공산당 내부의 지지를 얻어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최연소 정치국원이었으며, 서기국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브레즈네프도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여 바로 정치국 위원 자리를 주려고 했고 안드로포프도 그를 아꼈다.
반면 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를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안드로포프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후임자가 되길 바랬으나 그가 너무 일찍 사망하면서 권력은 체르넨코가 승계합니다.
고르바초프를 좋아하지 않았던 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는 농업서기인데 그가 서기국을 책임지면 서기국이 농업국이 될 수 있다면서 그를 해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에게 우호적이었고, 그를 서기장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던 우스티노프가 고르바초프는 그런 오류를 범한 적이 없다고 지지하였습니다.
결국 체르넨코도 얼마 못 가 사망하자 정치적 안정을 위해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던 정치국 안에서 가장 젊은 그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그는 기대를 한몸에 모았습니다.

 

3. 집권

 

앞서 보듯 그가 서기장이 되기 전에 소련은 세 명의 서기장이 1년마다 한 명씩 노환으로 사망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때문에 당시 서기장 후보 중 가장 젊었던 그가 고작 54세의 나이로 서기장이 됩니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시작된 소련의 개혁/개방 운동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체제에 들어서 반동, 정체되다가 그의 시대에 다시 활성화되고 정점을 맞은 것으로 평가되곤 합니다.

 

4. 개혁정책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농업식량 담당 서기로 있다가 19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습니다.
취임하면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면서 당시 침체에 빠져 있던 소련에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그야말로 임기 매년을 뉴스와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트렸던 인물입니다.
타임지 선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사상 최초로 서방 세계와의 군비 축소와 평화 무드를 만드는 업적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무엇보다도 냉전을 종식시켰습니다.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했습니다.
1989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나 1960년대 수정주의 논쟁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가까스로 화해 했습니다.
또 1989년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동·중부유럽 공산주의권 국가의 변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10월 27일), 이는 곧바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다수 중부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같은 해 몰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1945년 이후부터 이어져 오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40여년 이상 이어오던 공포, 대립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물꼬를 튼 인물.
이러한 업적으로 서방 세계로부터 이 사람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원본 노선은 공산당 일당 독재였던 소련과 중앙/동유럽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였습니다.
소련 공산당 역시 소련 사회민주당 비슷한 형식으로 바꾸려고 했고 순수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이전,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는 전과 비슷하게 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브레즈네프 이래로 만연했던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그는 전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북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고 했습니다.

 

5. 리더십의 문제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고르바초프는 그의 능력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안드로포프의 총애아래서 고속승진을 하여 당지도부에 진입한 신진인사였습니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았을 때,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과는 달리 19명 정원의 제27기 당정치국의 거의 막내였습니다.
집단지도체제의 도구였던 당정지국에 여러모로 고르바초프보다 커리어가 높고 나이도 많은 17명의 장로가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이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후 고르바초프는 집단지도체제인 당정치국 제도의 문제점을 깨닫고 1980년대 말 대통령제를 신설해서 소련 대통령자리에 오르지만, 이 때는 오히려 소련공산당을 탈당한 보리스 옐친 등이 조직적으로 그의 리더십에 반대하여 식물 대통령이 되고 만다.

 

6. 조급함

 

당시 소련은 아프간 전쟁을 위해 매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를 지출하고 있었던데다 1980년대 초에 비해 크게 떨어진 유가의 영향으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체르노빌 사태까지 터지는 바람에 급격한 개혁을 추진할 여건이 못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르바초프는 사회와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급하게 개혁안을 실시해 소련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초래했습니다.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안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개혁이 성공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중국이 30여년에 걸쳐 계획경제를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아직까지도 토지나 부동산 같은 경우는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고르바초프는 조급함에 경제를 더 망치고 자신의 정권 기반도 박살낸 것입니다.

 

7. 소련 경제 개혁의 실패

 

특히 내부적인 개혁의 실패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계획경제와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따른 경제 침체를 탈피하고자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했고, 1990년에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다당제와 의회 제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정치체제의 개혁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장경제 도입은 침체돼 있던 경제를 오히려 더욱더 막장으로 몰아갔습니다.
수십 년간 공산당 지시로 결정되던 상품 가격을 갑자기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 자율 가격으로 대체하니 혼란이 닥쳤던 것.
원래 의도는 보조금을 줄이고 고급 상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일을 줄이는 것이었지만, 막상 경영 자율화를 시켰더니 국영기업들이 국영상점에 싼값에 내놓아야 할 물건을 암시장에 몇배 이상의 가격으로 비싸게 팔면서 수십년간 (강제적으로) 안정화시켜 놓았던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유통체계가 난잡해지면서 이전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될 상품을 (값싸게) 사기 위해서 줄을 서야 했으며 줄을 서지 않으려면 시장에서 바가지를 써서 상품을 구해야했습니다.
또한 물가상승분을 벌충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는데 통화량 증대로 은행에 예금은 넘쳐났고, 구매력도 크게 올랐지만 막상 돈이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도 생산 부문 투자는 그에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줄은 더욱 길어지고 지하경제는 더욱 융성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처음부터 경제개혁이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라서 1988년에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이 5.
5%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구권 및 코메콘 붕괴로 1989년을 기점으로 다시 침체기로 접어들었고 1990년에 대조국전쟁 이래 최초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암시장 환율은 급속히 올랐습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날로 팽창하는 지하경제와 높아져 가는 물가상승률을 잡으려고 1991년 1월에 50루블과 100루블권 지폐를 무효화하는 방식의 화폐개혁을 시행했지만 이는 대놓고 독립 운동을 벌이던 발트 3국의 경제력을 마비시키는 것 외에는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뒤이은 1991년 8월 쿠데타로 고르바초프는 허수아비가 되고 각 산하 공화국들은 세금을 중앙정부로 납부하지 않고, 각 공화국별로 연계가 되었던 산업시설간의 연계도 끊어지기 시작하며 생필품 공급이 급속히 줄기 시작하며 소련의 경제는 마비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91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11%를 기록하였으며 그렇게 허무하게 고르비의 임기를 끝내게 됩니다.
실제로 헝가리나 1920년대 소련 등 여러나라에서 시행하면서 물자부족을 해소하는 효과를 봤던 방식이었지만 지방 분권화와 경영 자율권 확보가 정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로 이어졌고 거기에다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간에 정치적인 급변 상황까지 겹치며 경제파탄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소련 붕괴 이후로 극도로 벌어진 빈부 격차를 생각하면 경제개혁 실패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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