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지금 떠오르는 라이베리아 란 나라는?

by 맨기자 2022. 9. 28.
반응형

 기자맨의 최근 생활뉴우스 

라이베리아


1. 소개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 있는 공화국.
수도는 몬로비아.
공용어는 영어.
인접국가로는 시에라리온, 기니, 코트디부아르가 있습니다.

 

2. 국기

 

 

3. 건국과 근대

 

원주민 역사에 대해서 대부분을 구전과 고고학에 의존해야되기 때문에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원주민들의 상당수가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서부와 북부에서 왔다고 추정됩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 접촉하면서 '후추 해안', '곡물 해안' 따위의 이름이 붙여진 지역 인근입니다.
1602년에 네덜란드가 라이베리아 일대에 마을을 세운 적이 있지만 1년만에 관두었고 영국도 라이베리아 일대를 식민화 하려다가 중단했습니다.
이 나라가 세워지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아무래도 19세기 미국의 영향이 매우 강합니다.
후에 남북전쟁을 불러 일으킨 흑인 노예 문제가 심각해지는 와중에 1821년 미국에서 미국식민협회 주도로 해방 노예들이 아프리카로 역이민했고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이 식민지는 1847년 독립하여 라이베리아가 되었습니다.
사실 정착이 쉬운 일만은 아니라서 초기 해방노예들은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면서 정착하는 데 고생했다고 합니다.
라이베리아 초기에는 휘그당과 공화당간의 양당체제였지만, 1878년 이후로 1980년까지 휘그당 일당체제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독재체제가 결국 라이베리아를 몰락시켜 아이티와 동급의 막장국가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옆의 메릴랜드 공화국은 1954년까지 식민지로 남아있다가 별개의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 1857년에 라이베리아에 합병됩니다.
이 때문에 흔히 에티오피아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시대를 겪지 않은 둘뿐인 나라'로 소개되기도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라이베리아 지방에 식민지 구조가 성립되지 않았다 뿐이지 '식민(植民)'이란 개념에서는 전형적, 태생적인 식민국가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식민은 대항해시대 이후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례에서 이야기하는 식민은 고대 식민의 개념과 유사합니다.
이런 고대 식민지의 대표적인 국가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던 카르타고가 있습니다.
라이베리아라는 이름부터가 Liberia, 즉 해방(Liber, 라틴어)이라는 뜻입니다.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라는 나름 영예로운 타이틀을 가지고 건국했으나, 정작 미국계 해방노예(Americo-Liberian)들은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에서 온 자신들이 야만스런 토착 원주민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미국식 노예제와 신분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흑인 원주민들 중에서도 순진하거나 지적 장애가 있는 미국계 해방노예들을 속여서 다시 노예로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차별로 인해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라이베리아 당국과 토착민들의 갈등이 심했고, 1904년에 토착민 전원에게 시민권을 부여 철폐되었지만 그럼에도 미국계 라이베리아인들은 1970년대까지도 휘그당의 당권을 차지했으며 경제적으로 이권이 되는 사업에 손을 대고, 토착 부족의 족장 및 왕족 등 상층부와 통혼하며 기득권으로 군림했습니다.
아메리코 라이베리안들은 영어를 구사하면서 서양식 주택에서 살며 양복이나 바베큐, 잠발리아, 프라이드 치킨을 비롯한 미국 요리, 그리고 개신교를 비롯한 미국 문화와 문물들을 라이베리아에 대대적으로 들여놓았습니다.
이들은 토착신앙과 이슬람교를 여전히 신봉하고 토착언어를 제1언어로 구사하는 원주민들과 문화적으로 큰 차이점을 보였습니다.
사실 흑인들이 단일 집단도 아니었고, 라이베리아는 대다수 흑인 해방 노예들에게 연고지도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땅이었습니다.
17~19세기 노예 무역으로 인한 노예 수 증가에 서구 국가들만큼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흑인들도 참여했다는 점은 학계에서도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19세기 노예 무역의 쇠퇴에도 아프리카 내부에서 장기간 존속되어 온 노예 제도는 바로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내부 발전을 위해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변명하자면 19세기 중엽은 아프리카의 농산물 플랜테이션 사업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노예를 비롯한 노동력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시기긴 했습니다.
라이베리아만이 돌출된 행동을 한건 아니라는 것.
애초에 본국이었던 미국도 아직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되지 않은 상황인데 사고의 전면적 변화를 기대하는게 넌센스일 수도 있고 물론 잘한 일은 절대 아닙니다.
최소한 본인들도 노예 생활을 했던 케이스기에 더 비판받을 부분입니다.
그래도 유럽 및 미국과의 커넥션을 통해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 중에서는 무역이나 교육 등의 면에서 유리한 점을 차지하고 있었고, 국내외적으로 어느 정도 산업화에 성공하기만 했으면 최소한 남아메리카 국가들 정도의 경제력은 갖출 수 있었을 것이나, 내부의 마찰은 결국 10여 년 간의 내전을 부르게 됩니다.
독립을 하긴 했으나 말이 좋아 독립국이지, 미국의 괴뢰국이나 마찬가지다.
덕분에 독립 이후 미군이 주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유럽 아프리카 국가들을 무시하는 라이베리아에 대해, 유럽 열강들과 우간다를 비롯한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은 안좋게 봤습니다.
그리고 라이베리아에서 내전이 터지자 곧장 반군 쪽에 무기를 지원하며 친미 아메리코 라이베리아인 정권 타도에 힘을 보탰다.
이 시기는 상당히 혼란스러워 심지어 장교도 아닌 상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는 전쟁 발발 일주일만에 미국보다 먼저(1917년 선전포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4. 현대,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image/038/2006/... external/www.han...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의 군벌 찰스 테일러
혁명연합전선(RUF)’의 지도자이자 시에라리온 내전의 전범 포다이 산코

 

5. 찰스 테일러의 집권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He killed my ma,he killed my pa,but I will vote for him.
그는 우리 엄마를 죽였습니다.
그는 우리 아빠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투표할 것입니다.
찰스 테일러가 97년 대통령 선거에 내건 구호.
해석하자면, '그는 전쟁을 일으켜서 우리 부모님을 죽였습니다.
그가 져서 전쟁을 일으키면 이번에는 우리가 죽을 차례다.
우리는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를 뽑겠다'는 뜻.
찰스 테일러가 선거에서 자신이 지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사실상 공갈 협박을 대놓고 하며 어찌어찌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라이베리아 내전은 해결되지 못한 채 결국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터졌고 라이베리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되어버렸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찰스 테일러 문서 참고.
테일러는 집권한 지 1년만에 UN 평화유지군을 추방시켰는데 그 이유는 내전이 끝났으니 평화유지군이 필요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이에 임무 완료를 선언했던 UN은 이의 없이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테일러의 미친 짓이 시작됩니다.
1999년 테일러는 시에라리온에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이라는 이름의 무장 집단을 조직하여 시에라리온 내전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여기에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전사들을 이 혁명 연합 전선에 보내서 용병으로 참여하게 하여 시에라리온의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하거나 민간인 살해를 자행했는데 이 일들을 벌인 이유는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물론 반군을 훈련시키고 지원하는 데에도 역시 다이아몬드 밀무역을 통해 얻은 자금이 투입되었습니다.
한편 대통령이 된 찰스 테일러가 대통령이 된 이후 공권력을 이용해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정적을 탄압하는 폭압정치를 펼치자, 새뮤얼 도랑 다를 바가 없다며 테일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져 갔고, 무엇보다도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전에까지 개입하며 무자비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자 국제사회에서도 그에 대한 비난여론이 갈수록 거세져갔습니다.
결국 라이베리아 내 불만세력들이 2000년 2월에 시에라리온에서 ‘화해와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인 연합(Liberians United for Reconciliation and Democracy, LURD)’을 결성하며 내전을 재개했는데 이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시작된 내전은 2001년부터 정부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혀 서서히 테일러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반군들도 막장이 따로 없어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국경지대는 반군에 의한 무자비한 강간과 약탈 그리고 온갖 잔학행위가 벌어지며 황폐화되었습니다.
한편 반군은 여러 지역을 장악해나가며 2003년에 이르러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까지 공격하였고, 이즈음 새로운 반군집단 ‘라이베리아 민주 운동(Movement for Democracy in Liberia, MODEL)’이 출현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이에 2003년 6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다시 내전이 일어났고 LURD는 몬로비아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감행해 1,000여 명이 사망하고 45만 여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2002년과 2003년에 벌어진 2차 라이베리아 내전은 가장 치열한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마약을 주고 총을 쏘게 하였고, 반군들은 길에서 눈에 띄는 대로 사람들을 사살했습니다.
정부군 혹은 반군이 되어도 같은 편이 아니면 언젠가는 총을 겨누기 때문에 내전에 참여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다 죽였습니다.
내전 중반 군이 항구를 점령하면서 도시로 양식이 반입되는 것을 막아 몬로비아 시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고, 차와 설탕으로 끼니를 때웠다.
찰스 테일러가 몰락하기 전인 2003년에는 의사회 본부에서 보내 온 구호품을 통째로 약탈당하고, 임시로 지은 진료소에서 쫓겨나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진료소에는 늘 환자와 강간으로 인해 생긴 사생아가 넘쳐 화장실은커녕 전염병 환자 격리실도 마련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참상을 전한 한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의 한 서방국가 출신의 의사는 “유산탄에 등을 맞은 사람이 사지를 모두 잃은 채 실려와서는 이미 숨진 나머지 가족들을 애타게 찾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렇게 내전이 격화되자 UN은 반군들이 항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반군은 테일러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기 때문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테일러에게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고 여러가지 제재조치들이 가해지자 찰스 테일러가 나이지리아로 망명하면서 라이베리아 내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테일러가 2003년 8월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연설한 후 라이베리아 대통령직은 모지스 블라가 승계를 하기는 했지만 반군이 이미 수도인 몬로비아를 공격하였고 결국 반군들의 공격으로 테일러 정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UN에서 라이베리아에 50,000여 명의 인력을 파견해 국가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1989년부터 2003년까지 15년의 내전이 끝났습니다.
2003년 10월에 미국이 동원한 서아프리카 연합군 3,500명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라이베리아 정권을 앞으로 책임지는 위원회를 만들고 브라이언트를 의장으로 세웠다.
브라이언트 의장은 미국과 UN의 절대적인 지시와 후원 하에 여러 종파들이 지금까지 친미 흑인 정권과 싸운 반정부 게릴라 10만명 이상의 반군들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강행하여 성공했습니다.
2005년 10월 11일 UN과 서아프리카 연합군의 평화유지 활동에 힘입어 드디어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엘런 존슨 설리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내전은 끝났지만 내전에서 벌어진 잔학행위는 처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내전에서 약 1백만 명 가량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전투의 진행에 따라서 이웃나라인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를 전전하며 피난을 해야했지만 문제는 시에라리온과 코트디부아르 이 두 나라 또한 모두 내전에 휩싸인 상태기 때문에 정착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였다, 게다가 국제단체의 구호물자는 무장집단에 의해 약탈당하는 탓에 제대로 된 지원이 되지 않았으며, 정부군이고 반군이고 할 것 없이 자기측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은 부역자로 몰아 살해하고, 고작 10살이 된 어린이까지 징집해 무기를 쥐어주고 전선에 투입시켰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강간은 물론이고 젊은 여성이나 소녀들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끌고 다녔는데, 이런 식으로 라이베리아 내전에 투입된 청소년들이 유니세프가 추산하기로는 전체 청소년 인구의 10%, 강간으로 양산된 사생아들이 1% 였다고 합니다.
특히 반군들은 UN군 배치를 앞두고 마지막 기회라며 대대적인 약탈과 징병, 살해, 강간 등을 자행하였습니다.
고문과 납치도 행해졌다 또한 라이베리아 정부군은 이웃 시에라리온 국민들까지 납치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찰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에 반군을 도와준 혐의로 기소되어 UN 국제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결국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6. 이후

 

엘런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Sirleaf, 1938년 10월 29일 ~ ) (83세)2005년 10월 11일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치러졌습니다.
1차 투표에서는 22명의 후보가 출마해 조지 웨아 후보가 29.
8%, 엘런 존슨 설리프 후보가 19.
7%를 득표했습니다.
1차 투표의 득표율만으로 볼 때는 결선투표에서 웨아가 당선될 것이 유력해 보였고 많은 해외 언론이 그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2005년 11월 8일 2차 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선거는 10월 11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의 결선투표였습니다.
1차 투표에서는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거는 매우 평온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국 3,000여개 투표소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지만 우려할 만한 사태는 없었습니다.
통신시설과 도로부족으로 선거결과가 확정되려면 1주일은 걸린 것이라는 예측이었으나 라이베리아인들이 높은 관심을 반영한 듯, 선거후 이틀이 지나자 존슨설리프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조지 웨아 측에서는 즉시 부정선거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일부 투표함에서 유권자수보다 많은 투표용지가 나왔다는 것이 웨아측의 주장이었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무관심했고 대세에는 지장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유엔이나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의 선거감시단도 이번 선거가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라는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최종결과는 존슨설리프 59.
4%, 웨아 40.
6%라이베리아는 2006년 중도 자유주의 성향인 통일당(Unity Party) 소속 엘런 존슨 설리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첫 여성 대통령인 설리프는 기초교육 보급, 평화 정착 등의 성과를 낸 공로로 201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물론 내전으로 인해 GDP는 여전히 세계 최하위에 워낙 장기간에 걸친 내전의 결과로 국가가 피폐해지고 사회적 손실이 막대한데다 지역 여성단체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현재도 심각한 상태로 매춘을 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게다가 부룬디처럼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버티는 일부 집단들이 다시 들고일어날 가능성도 있어서 아직은 갈길이 멀다.
실제로 2007년 3월 존슨설리프 정부는 정부기금을 횡령한 혐의로 과도정부 대통령 브라이언트를 체포하여 기소했으며, 2007년 7월 17일 브라이언트 과도정부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조지 쿠쿠(George Koukou)와 새뮤얼 도 정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찰스 줄루(Charles Julue)를 중심으로 한 전직 장교들의 쿠데타 기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적발되어 실패했습니다.
여담으로 줄루는 1994년에도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ECOMOG에 의해 진압된 적이 있습니다.
한편 존슨설리프는 대통령 임기를 2번 연임하며 12년 임기를 모두 채웠다.
이후 유럽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지난 대선에서 존슨설리프에게 패한 조지 웨아가 2017년 10월 10일 치뤄진 대선에 출마했고, 스포츠 스타의 명성 등에 힘입어 1차 투표에서 39.
0%를 받아 결선 투표에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전직 독재자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 주얼 하워드를 선택하고 옥중의 테일러 본인과도 통화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실제 선거에서 테일러의 정당이었던 극우 국민애국당과 연합을 해서 이겼는데, 웨아 본인부터가 우파 진영 소속이라 이쪽 지지자들의 기반을 다지려는 목적인 듯합니다.
하여튼 이러저러한 논란 끝에 조지 웨아는 결선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8년 1월 22일에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 주얼 하워드 역시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전 부인이라고 보기도 뭐한게, 찰스 테일러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내 전 부인 주얼 하워드 테일러에게 투표하라.
주얼이 당선되면 나도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라는 음성을 녹음해 뿌릴 만큼 그녀를 정치적 동지로 여기고 있으며, 덕분에 그의 근거지인 '봉 카운티'에서 주얼 하워드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될 만큼 테일러의 대리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와 그녀의 세력을 흡수한 조지 웨아 역시 테일러에게 포섭되어 라이베리아 정치에 다시 테일러가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편, 2019년 6월 7일 조지 웨아 정권의 경제 부진과 고물가에 항의하는 시위가 몬로비아에서 발생했습니다.
2021년 7월 18일에 라이베리아 앞바다에서 선박이 침몰해 최소 15명이 실종됐습니다.
.

 

7.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라이베리아 내전이 끝나고 라이베리아에서는 전쟁범죄를 심판하자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세워졌지만 처벌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범죄 조사 임무만 부여받았고, 집단살해 등 국제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재판소가 창설된 2002년 이후 사건에 대해서만 관할권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라이베리아에서는 르완다, 캄보디아,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처럼 국제재판소가 설립되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만약 처벌을 한다면 모든 사람이 살인으로 기소받을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극악무도한데다 교화가능성도 전혀 없는 사람 빼고는 사회차원의 제재 및 교정으로 끝내자고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악명높은 찰스 테일러 및 소수의 전범만 처벌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법적 처벌을 면하고 그냥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에 새뮤얼 케니언 도의 귀를 잘라내 출혈로 죽게 내버려둔 군벌 지도자 프린스 존슨이 상원의석에 앉아 있을 정도로 전쟁범죄에 완전한 면책을 준 게 바로 라이베리아다.
프린스 존슨은 이후 기독교인 목사로 변신했으며, 2005년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 기반인 님바 지역에서 상원의원으로 출마해서 선출되기 까지 했습니다.
특히 그는 2010년 9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도 자신이 특정인을 고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뻔뻔스러운 개드립을 날렸으며, 자신은 압제적인 체제에 맞서 국민을 해방시키려 싸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만 내전 기간 주민들이 고통을 입었다면 그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하며 별로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또 다른 미치광이 장성 한 명은 한때 수백 명의 민간인을 밧줄로 묶어놓은 채 강물에 빠뜨려 익사시킨 죄가 있었음에도 현재 버젓이 라이베리아의 상원의원을 지내고 있습니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의 반군 지도자 조슈아 밀턴 블라히.
심지어 라이베리아에서 손꼽히는 최악의 학살자가 목회자로 변신하기도 했습니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반군 지도자로 2만명 이상을 학살한 조슈아 밀턴 블라히인데, 그는 옷을 다 벗은 채 적에게 돌격을 하기도 해서 이른바 "엉덩이 깐 장군(general butt naked)"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목사로 활동하며 과거 피해자들을 찾아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사실은 밀턴 블라히는 자신이 목사가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기 전에 우리는 보통 술과 마약에 만취가 되어 동네 십대 아이를 희생물로 바치고 이 아이의 피를 들이킨 다음 완전 나체가 되어 형형색색의 가발을 뒤집어쓰고 민간인들로부터 탈취한 핸드백을 들고 다녔습니다.
우린 길에서 맞닥뜨리는 누구든지 살육했고 이들의 머리를 잘라내어 축구공으로 썼다.
우린 완전히 취해서 벌거벗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고 살의만 등등했었습니다.
우리는 수백 명을 살해했습니다.
사실 몇 명을 죽였는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그러다가 2004년 6월에 하나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웅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그 후부터 나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미친 발언을 일삼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다가 지난 2008년 1월 15일,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는 내전 당시 군벌들의 범죄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진실화해위원회 청문회가 열렸는데, 블라히는 신발부터 바지, 셔츠까지 모두 하얗게 차려입은 채 청문회에 출석했습니다.
이 청문회에 증거사진들이 제출되었는데 블라히가 이끌던 ‘벌거벗은 엉덩이 연대’의 소년병들이 사람의 심장을 먹고 있는 모습, 거리 교차로를 사람의 뼈로 장식하는 모습, 처녀 소녀들을 윤간하고 있는 모습들이 찍혀 있었습니다.
블라히는 자신의 나신이 탄환을 보호해준다고 믿어서 소년병들도 신발만 신은 나체로 전투에 임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조슈아 밀턴 블라히가 사람의 심장을 먹기도 했다는 잔학행위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는 현재까지도 목회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라이베리아 정부가 의도한 측면이 있는게 어지간해선 이런 식으로 죄를 드러내 사회적 응징을 받게 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사이렇게 범죄자들이 득시글거림에도 라이베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비극을 들춰내지 말고 그냥 묻어두자는 여론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헤이그 재판을 받고 있을 당시의 인물들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찰스 테일러 대통령을 지지하는 간판이 몬로비아 거리 곳곳에 걸려 있고 심지어는 테일러를 사랑하는 모임이 운영하는 웹사이트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헬게이트라면 우리가 소위 문명사회에서 배우고 지켜오는 도덕률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되는 아노미현상이 벌어질 법도 합니다.
이를테면 문명사회에서라면 사람 한명을 죽여도 죄책감을 크게 느끼고 자수하거나 PTSD에 시달리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애들도 사람을 킥킥대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또한 테일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라이베리아에서 전범 재판을 해야 한다면 라이베리아 국민 모두가 피고석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 "우리들 중에 손에 피 묻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냐?"라는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관광시키는 논리를 펼치면서 전범 재판에 반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흠좀무한 사실은 라이베리아의 많은 가정에서는 강간을 당한 딸을 갖고 있는 동시에 군대에 끌려나가 남의 집 딸을 강간 살해한 아들을 두고 있는 집안이 숱하게 많이 있는 까닭이 있을 정도로 처벌 받을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범죄자 처벌을 주장할 수 없는 난감한 처지에 있긴 합니다.
그렇게 보면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장 두드러지는, 진정한 피해자인 참극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차피 가해자 본인이 평생 고통받을 테니 법적으로는 가능한 용서하고 잊자는 모양입니다.
나아가서 라이베리아 역시 칠레 같은 다른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확산은커녕 자국의 이익만 따져가며 필요에 따라 독재자나 전범들도 지원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당시 미국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지원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 정치인들이 하급 전범으로라도 처벌받는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라이베리아의 반군 사령관 출신 인사가 이례적으로 스위스에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 법원측은 반군 사령관 출신 인사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습니다.
.

 

8. 경제

 

서아프리카경제
 

카보베르데
 

모리타니
 

세네갈
 

감비아
 

기니비사우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말리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가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니제르

 

9. 문화

 

애초에 건국 자체가 미국에서 온 해방노예들 주도로 이뤄지다보니 문화에 있어서도 미국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다만 마냥 미국의 영향만 받은건 아니고 해방노예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전통문화도 어느정도 보존되어있으며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드파운드법을 유일한 도량형으로 쓰는 나라중 하나입니다.
.

 

10. 스포츠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장비상의 애로사항으로 인해서 미식축구와 야구는 인기가 별로 없고 주로 축구와 농구가 인기가 많습니다.
AC 밀란과 첼시 FC에서 뛰었던 전설적인 축구선수 조지 웨아가 이 나라 출신입니다.
웨아는 200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대권에 다시 재도전하면서 11월 25일까지 2차 결선투표의 결과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7년 12월 28일 2차 결선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자신이 사비까지 들여가면서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FIFA 월드컵에도 도전했으나 2002년 한일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나이지리아에게 승점 단 1점 차이로 밀려서 아깝게 탈락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 나라의 축구에 대한 자세한 건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뛰고 있는 캐나다인 알폰소 데이비스가 라이베리아 출신입니다.
2018년 K리그 2 소속의 안산 그리너스 FC가 이 국가 출신의 공격수인 세쿠 코네를 영입했습니다.

 

11. 외교

 

서아프리카외교

카보베르데

모리타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감비아

세네갈

기니비사우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

가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서부 토고랜드
1
1: 명목상 가나의 지역이자 미승인국가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 · 서아시아 · 남아시아 · 중앙아시아 · 캅카스
동유럽 · 중부유럽 · 서유럽 · 남유럽 · 북유럽
북아메리카 · 중앙아메리카 · 카리브 · 남아메리카
서아프리카 · 중앙아프리카 · 남아프리카 · 북아프리카
오스트랄라시아 · 멜라네시아 · 미크로네시아 · 폴리네시아

카보베르데

모리타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감비아

세네갈

기니비사우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

가나

토고

베냉

나이지리아

서부 토고랜드
1
1: 명목상 가나의 지역이자 미승인국가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 · 서아시아 · 남아시아 · 중앙아시아 · 캅카스
동유럽 · 중부유럽 · 서유럽 · 남유럽 · 북유럽
북아메리카 · 중앙아메리카 · 카리브 · 남아메리카
서아프리카 · 중앙아프리카 · 남아프리카 · 북아프리카
오스트랄라시아 · 멜라네시아 · 미크로네시아 · 폴리네시아

 

12. 코트디부아르와의 관계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에서 독립한 이후에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양국은 아프리카 연합의 정회원국입니다.
그리고 코트디부아르는 라이베리아와 가나와 접해 있어서 영어가 제1외국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라이베리아도 경제적으론 코트디부아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3. 라이베리아의 현 상황

 

라이베리아는 20여년에 걸친 내전을 거쳐 2006년 민선 대통령의 취임 이후 정치적으로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처참하기 짝이 없으며 공권력과 치안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가 경찰의 재편 및 능력 향상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치안유지는 거의 전적으로 UN 평화유지군(UNMIL)에 의존하고 있으나, UN에 의한 민생 치안 유지에도 한계가 있는 상황입니다.
생계형 범죄가 빈민가를 중심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강도와 강간과 같은 강력범죄가 매우 심각하며 백인을 비롯한 외국인 여인들이 강간을 당해 임신하는 경우가 잦으며 범죄자들은 총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특히 택시안에서 강도를 당하는 사례가 많은데, 특히 다른 승객이 먼저 타고 있는 경우에는 운전자와 승객이 한패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타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도 아메리카 라이베리아인과 원주민, 원주민 종족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종종 집단간의 충돌로 나타나 폭동과 인민재판이 벌어지거나 관공서를 습격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높은 청년층 실업률과 라이베리아의 주수입원인 고무농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폭동 그리고 국가 행정력의 부재를 이유로 불법적인 자원을 팔아넘기거나 마약을 거래하는 범죄의 증가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약 7,200명에 이르는 전직 정부군의 군인과 무장단체 전투원의 사회복귀도 상당히 해결이 어려워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14. 여행 정보

 

 라이베리아,공무원,공무원 얼굴,성범죄,외교관,공무원 더쿠,디시,인,공무원 사건,더쿠,프로필 

반응형

댓글